[2025.06.15] T1 vs 한화생명 MSI 진출 최종전 밴픽 분석
솔직히 말해서 밴픽 분석은 처음 시도해본다. 언제나 그랬듯 화면에 펼쳐지는 경기 내용에만 집중했지, 그 경기의 밑그림이 어떻게 그려졌는지에 대해선 깊이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이번 T1과 한화생명의 MSI 선발전 최종전을 보고 나니, 밴픽만으로도 이미 경기 절반은 시작된다는 걸 새삼 실감하게 됐다.
비록 전문적인 분석은 아니지만, 인상 깊었던 장면들을 되짚어보며 나름의 시선으로 세트별 밴픽을 정리해보고자 한다. 피드백은 언제든 환영이다. 틀린 부분이 있다면 알려주시고, 더 잘 아는 사람이 있다면 같이 이야기 나눠보면 좋겠다. 그럼 지금부터, 밴픽이 어떻게 경기를 만들었는가를 함께 살펴보자.
세트별 밴픽 분석
1세트
진영 | 팀명 | 밴 | 픽 |
블루 | HLE | 판테온, 럼블, 아지르, 녹턴, 신짜오 | 제이스, 바이, 아리, 미스포츈, 렐 |
레드 | T1 | 요네, 뽀삐, 탈리야, 바루스, 자야 | 그웬, 오공, 사일러스, 칼리스타, 니코 |
한화생명은 제이스-바이-아리-미스포츈-렐로 초반 교전과 렐-미포 궁극기 연계를 노린 돌진 조합을 선택했다. 제이스와 아리로 포킹과 사이드 압박을 가하고, 바이가 돌진해서 한타를 여는 플랜이었다.
T1은 칼리스타-니코 바텀 듀오에 오공 정글을 더한 공격적 조합으로 맞섰다. 핵심은 니코 서폿이었는데, 케리아의 인터뷰를 확인해보면 "LPL 팀들과의 스크림에서 니코의 티어가 올라오는 걸 보고 바이 대응으로 기용했다"고 한다. 즉, 한화생명에게 바이를 풀어준다면 당연히 픽할 걸 예상하고 준비한 카운터 전략이었다.
그리고 경기 내용 역시 T1의 전략이 완벽하게 작동했다. 바텀 듀오는 초반부터 라인을 장악했고, 오너의 오공은 10/1/8이라는 압도적 스코어로 한타마다 성공적인 진입을 보여줬다. 한화생명은 미포-렐 궁극기 콤보로 한타를 터뜨리려 했지만, T1이 오공의 진입과 니코의 이니시로 먼저 싸움을 걸었고 칼리스타의 화력으로 마무리하는 패턴이 반복됐다.
결국 되돌아보면 한화생명의 바이 픽은 확실한 패착이었다고 볼 수 있다. LCK에서 고정밴이던 바이를 풀어줌으로서 준비되지 않은 바이를 억지로 사용할 수 밖에 없었고, 바이를 꺼내긴 했지만 T1의 카운터 전략에 완전히 역이용당하면서 의도했던 한타 구도를 만들어내지 못했다. 그렇게 한화생명은 제이스 포킹이나 아리의 픽한 이유를 찾지 못한 채 30분 만에 일방적으로 무너졌고, T1은 드래곤과 전령 같은 오브젝트까지 완벽하게 장악하며 압승을 거뒀다.
2세트
진영 | 팀명 | 밴 | 픽 |
블루 | HLE | 아지르, 오른, 트런들, 카밀, 레나타 | 사이온, 신짜오, 빅토르, 진, 노틸러스 |
레드 | T1 | 요네, 탈리야, 럼블, 자야, 이즈리얼 | 암베사, 판테온, 라이즈, 바루스, 뽀삐 |
2세트에서 한화생명은 방향을 확실히 틀었다. 사이온과 빅토르로 단단함과 후반 캐리력을 동시에 노리고, 신짜오와 노틸러스로 싸움의 포문을 연 뒤 진의 CC와 궁극기로 마무리 짓겠다는 계산이었다. 무엇보다도 1세트에서 당한 일방적인 패배를 반복하지 않겠다는 의지가 느껴지는 조합이었다.
한편 T1은 저 단단한 한화생명의 조합을 상대로 빅토르, 진만 골라 빼먹어야 하는 어려운 숙제를 해결하기 위해 암베사와 뽀삐라는 카드를 뽑아 들었다. 그리고 여기서 도란의 주사위가 다시 한번 돌아갔다.
경기 흐름은 당연하게도 한화생명이 웃는 그림이었다. 빅토르의 포킹, 사이온의 탱킹이 제법 위력적이었고, 한때는 글로벌 골드에서도 앞서기도 했다. 하지만 흐름을 결정적으로 틀어버린 건 용 한타였다. 도란의 암베사가 말 그대로 게임을 폭파시켜버렸다. 궁극기로 HLE 주력들을 휩쓸면서 한타를 뒤엎었고, 그 한방에 바론까지 연결되면서 승기는 T1 쪽으로 완전히 넘어갔다.
오너도 경기 후 “2세트가 힘들었는데 도란이 암베사로 빛났다”고 말할 정도였다. 그 말 그대로였다. 도란은 2세트에서 암베사로 무려 4만2천에 가까운 딜량과 제우스를 상대로 6.6K 골드차이를 벌리며 경기의 판도를 혼자 뒤집었다.
한화생명도 가만있진 않았다. 신짜오-노틸러스 조합으로 계속해서 전투를 시도했지만, 뽀삐의 W와 궁극기에 발이 묶였고, 진은 후반으로 갈수록 존재감이 희미해졌다. T1은 전투 때마다 판테온-라이즈의 궁극기로 숫자 싸움에서 유리한 고지를 선점했고, 마지막 교전에서 대승을 거두며 34분 만에 넥서스를 밀어버렸다.
3세트
진영 | 팀명 | 밴 | 픽 |
블루 | T1 | 요네, 탈리야, 오른, 트페, 트런들 | 크산테, 리신, 애니, 자야, 라칸 |
레드 | HLE | 제드, 녹턴, 럼블, 아지르, 요릭 | 나르, 니달리, 갈리오, 루시안, 브라움 |
마지막 3세트, 특이하게도 한화생명은 레드팀을 선택했다. 일반적으로 블루팀이 선호되는 현 메타에서 레드 진영을 고른 이유는 명확했다. 피어리스 드래프트상 이미 주요 챔피언들이 빠진 상황에서, 한화는 후픽의 이점을 살려 마지막까지 탑을 숨긴 채 T1 탑 도란의 고점을 견제하려 했다. 앞선 두 세트에서 도란이 연달아 존재감을 드러낸 만큼, 후픽으로 카운터를 맞추겠다는 계산이었다고 생각 된다.
T1은 그런 한화를 의식했는지 전혀 모른다는 듯, 자신들이 가장 잘하는 방식으로 조합을 구성했다. 크산테, 리신, 애니, 자야, 라칸. 이름만 들어도 딱 그림이 그려지는 정통 한타 조합이다. 크산테는 어떤 챔피언을 상대하든 든든하게 버틸 수 있는 안정감의 상징이고, 리신은 오너가 중요할 때마다 꺼내드는 시그니처 픽. 애니는 이니시와 폭딜을 모두 갖췄으며, 자야-라칸은 교전과 생존 양면에서 지금도 최고의 궁합을 자랑하는 바텀 듀오다.
반면 한화생명은 나르-니달리-갈리오-루시안-브라움이라는 낯선 조합을 꺼냈다. 피어리스 드래프트 룰로 주요 정글 챔피언들이 모두 빠진 상황에서, 피넛은 숙련도 높은 니달리를 선택해 정글 속도와 갱킹 주도권으로 판을 흔들려는 설계를 준비한 듯 보였다. 미드 갈리오와의 연계도 염두에 뒀겠지만, 글로벌 합류와 폭딜 니달리의 궁합은 어딘가 어긋나 있었고, 브라움-루시안 바텀 역시 과거에야 강했지만 현재 메타에선 잘 보이지 않는 조합이었다.
그리고 한화생명은 마지막까지 숨겨둔 탑 카드로 제우스는 나르를 선택했다. 이는 도란의 크산테를 상대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픽이자, 한타에서 측면 이니시에이팅과 메가 나르 CC 한 방을 기대한 전략이었다. 나르-갈리오로 로 한타 진입 각을 만들고, 니달리와 루시안의 폭딜을 실어주겠다는 구도였지만 조합 전체의 유기성은 지나치게 복잡했고, 실행 난이도는 높았다.
밴픽 단계에서 이미 승부는 기울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T1은 챔피언 하나하나에 숙련도가 묻어났고, 조합 자체도 명확한 의도를 담고 있었다. 라칸과 리신이 이니시 타이밍을 열고, 애니가 궁극기로 눌러버리는 구조. 자야는 깃털로 반격하면서 한화생명의 진입을 차단할 수 있었다. 그에 비해 한화는 주요 픽들을 잃은 채 조합 완성도에서 급하게 맞춘 인상이 강했고, 특히 니달리-갈리오-브라움이라는 상체 3픽의 시너지가 애매했다.
경기 내용은 더욱 극단적이었다. 시작부터 오너의 리신이 바텀을 찌르며 퍼스트블러드를 만들어냈고, 라칸은 로밍으로 미드-정글을 완전히 뒤흔들었다. 니달리는 정글 설계도, 교전 주도도 제대로 풀리지 않았고, 갈리오는 애니에게 완전히 묶였다. 15분이 채 되기 전에 T1은 드래곤 2스택을 확보했고, 킬 스코어도 이미 압도적인 차이였다. 결국 25분, 킬 스코어는 29대3. 한화생명은 포탑 하나 밀지 못했고, 넥서스는 속절없이 무너졌다. 거의 퍼펙트 게임이라 해도 과언이 아닌 경기였다. 그렇게 T1은 시리즈를 3:0으로 스윕하며, LCK 두 번째 MSI 진출권을 당당히 거머쥐었다. 그리고 이 마지막 3세트는, 실력과 준비, 완성도 모두에서 T1이 왜 세계 무대에 서야 하는지를 보여주는 증명이었다고 생각 된다.
전략적 밴픽 차이
이번 시리즈에서 가장 두드러진 차이는 두팀의 밴픽 철학에서 드러났다.
T1은 처음부터 끝까지 철저하게 계산된 밴 전략을 유지했다. 요네와 탈리야를 세 세트 내내 금지하며 젠지전에서 활약한 제카의 주력 챔프를 완전히 봉쇄했고, 바이퍼의 원딜 풀까지 제한해 미스 포춘과 진 같은 비주류 카드를 꺼내게 만들었다. 반면 한화생명은 오너의 설계형 정글러들과 도란의 한타형 탑 챔프를 차단하려 했지만, 전체적으로 T1의 조합 완성도에 미치지 못했다.
특히 눈에 띄는 건 T1의 일관성이다. 피어리스 드래프트라는 복잡한 룰 속에서도, 매 세트 이니시에이팅과 오브젝트 주도권을 염두에 둔 조합을 완성해냈고, 오공-판테온-리신 같은 핵심 챔프를 활용해 게임의 흐름을 틀어쥐었다. 반면 한화생명은 경기마다 밴픽 방향이 바뀌며 전략적 일관성이 흔들렸고, 특히 마지막 3세트에서는 니달리 중심의 초반 설계와 후반 한타형 구성이 어중간하게 섞여버렸다. 이는 1세트에서 준비되지 않은 바이를 선택함으로서 준비해왔던 모든 밴픽이 틀어졌다고 밖에는 생각되지 않는다.
결국 승부는 단순한 조합 싸움을 넘어, 얼마나 준비가 잘 되어 있었는지, 얼마나 자신들의 플레이 스타일을 밀고 나갈 수 있었는지에서 갈렸다. T1은 그 모든 요소에서 한화생명을 앞섰고, 3:0이라는 완벽한 결과로 이를 증명했다. 챔피언 폭, 운영의 정교함, 팀워크, 그리고 고점이 떠버린 도란, 기억이 돌아온 페이커까지. 모든 면에서 우위에 있었던 T1은 그렇게 젠지와 함께 또 한 번 국제무대행 티켓을 손에 넣었다.